[이적표현물] 괜히, 그런 걸까

일러스트레이션 : 아방,글 : 이적

잠수 탄 줄 알았던 태일을 뒤로하고 혜원과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를 보다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태일의 여자친구 혜원이었다.
“이적 오빠, 태일 오빠랑 부산 잘 다녀오셨어요?”
“아, 네… 오랜만이에요. 아침부터 무슨 일로?”
“태일 오빠가 그 이후로 연락이 안돼요. 혹시 왜인지 아시나 해서….”
“그래요? 제가 해볼까요?”
“네. 그럼 좋겠는데….”
전화를 끊고 태일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응답이 없었다. 뭘까. 혹시 이제 혜원에게 질려버려 알아서 떨어져 나가길 바라며 잠수 탄 걸까.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오래 만난다 했다. 그나저나 중간에서 내가 난처해질 걸 뻔히 알면서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이 나이에 이런 중재 역할을 하게 만들다니, 태일은 정말 성가시기 짝이 없는 존재다. 어찌해야 하나 궁리하던 차에 혜원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시간 괜찮으시면 오늘 만나주심 안돼요?’

혜원이 다니는 학교 안의 시네마테크에서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특별전이 열린다며 그리로 오라고 했다. 산뜻한 디자인의 예술대학 건물이었다. 로비로 들어가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잔을 손에 든 혜원이 반갑게 맞는다. 생각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언어의 정원>이 너무 좋았는데, 학교 안에서 특별전까지 하네요. 신카이 마코토 좋아하세요, 오빠?”
“신카이 마코토… 잘 몰라요. 한자 이름이 신해성이네요. 신화의 혜성인가. 하하하.”
“여전하시구나… <언어의 정원> 안 보셨으면 잘됐어요. 마침 그것부터 상영하거든요. 전 몇번이고 또 봐도 좋아요.”

그렇게 들어가서 본 <언어의 정원>은 무척 아름다웠다. 수채화 같은 작화와 빗방울에 파르르 떨리는 이파리 같은 정서, 혜원이 왜 열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극장 밖으로 나와 다음 작품 상영을 기다리는데, 함께 감동했길 바라는지 그녀가 나를 간절히 쳐다보고 있다.
“어땠어요, 오빠?”
“좋네요. 아름답고. 무엇보다 짧아서 좋았어요. 한 45분 했나? 쓸데없이 긴 작품 보는 거 요즘 좀 힘들어졌거든요. 콘서트도 90분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은데 한국 가수가 그렇게 했다간 욕먹을 거 같아서, 전 요새 게스트 없이 120분 남짓 해요. 질질 늘어지는 거보다 압축적이고 좋아요. 관객들도 만족도가 높고.”
“에이, 짧은 거 말고, 이미지가 너무 멋지지 않아요? 두 사람을 담는 장면도 그렇지만 그냥 하늘, 숲, 연못, 전철, 거리 같은 걸 툭툭 보여주는 게 가슴 아리고 예쁘잖아요. 백 마디 대사보다 훨씬 쓸쓸하고, 애틋하고.”
“그러게요. 마지막에 실제로 노래도 흐르던데, 영화가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대요. 저 안노 히데아키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좋아하거든요. 거기도 수돗가, 빈 교실, 철도건널목 장면이 중간중간 괜히 나오는데, 보고 나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죠.”
“<카레카노> 저도 완전 좋아해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O.S.T에 넣었던 제 노래 중에 <그런 걸까>라고 있어요. 후렴 가사에 그런 이미지를 담으려고 했어요. ‘구름이 천천히 하늘을 가로지를 때, 처마 끝에 맺힌 물방울 떨어질 때, 난 그냥 이대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늘 그렇게 널 생각하는데.’”
“그 노랜 몰라요. 죄송해요. 아아, 신카이 마코토는 정말 천재인 거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진짜처럼, 아니 진짜보다 아름답게 그릴 수가 있지?”
“미국의 극사실주의 미술가 척 클로스가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대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혜원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재미없는 맞장구에 실망했나.

잠시 뒤 이어 본 작품은 <초속 5센티미터>였다. 두편을 보니 감독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영어 부제가 <A chain of short stories about their distance>다. 사랑하는 이들의 거리/거리감에 대한 이야기들. 아프도록 매혹적인 영상과 매미 소리에까지 의미를 담는 사운드 디자인은 극장에서의 애니메이션 체험이 주는 쾌감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정신없이 빠져들어 있다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옆을 돌아보니 혜원이 펑펑 울고 있었다. 이 영화 때문인지 태일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두 가지가 섞여서겠지. 당황스럽다. 별다른 위로의 말도 못하고 쭈뼛거리다 세 번째 작품을 맞는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시작한 지 삼십분도 안돼 그녀가 벌떡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나도 황급히 쫓아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를 따라 걸었다.
“뜻밖에 SF네요. SF 별로 안 좋아해서 나온 거죠? 나도 좀 놀랐네.”
“아니에요. 한 여자랑 두 남자 이야기가 나오길래 끝을 보기가 무서워져서요.”
무슨 말일까. 빠르게 걷던 혜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내쪽으로 돌아선다.
“저번에 <은밀하게 위대하게> 보시던 날, 저 우연히 만나셨잖아요.”
그랬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다가 극장에서 나오는 혜원과 그녀 친구와 마주쳤다. 관람 뒤엔 나를 기다린 그녀들에다 혜원이 억지로 합류시킨 태일까지 더해 같이 밥을 먹으러 갔다. 이전에 크게 싸웠던 태일과 그날을 계기로 자연스레 다시 어울리게 됐었다.
“오빤 그거 우연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우연이 아니면요?”
“모르는 척하기는.”
혜원이 휙 몸을 돌리곤 더 빨리 걷기 시작한다. 영문을 모른 채 그녀를 쫓아갈 수밖에 없다. 그때 내 전화벨이 울린다. 태일이다. 가쁜 숨을 감추며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연락이 안돼? 혜원씨랑은 왜 연락 끊었어?”
“씨바, 이적, 뭔 소리야. 이제 일어나서 보니까 네 문자 와 있길래 바로 전화하는 건데. 그리고 혜원이 얘기는 어떻게 알았냐. 걔 요 며칠 연락이 안돼. 내가 뭘 잘못했나, 통 모르겠는데.”
저만치 멈춰선 혜원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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