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표현물] 어쩌다 그대를 사랑해서 그만…

<우리 선희>를 보면 떠오르는 그녀들과 돌아오지 않는 너와 나의 청춘

일러스트레이션 : 아방,글 : 이적

일러스트레이션 아방

꿈을 꾸었다.
굉음이 지축을 울리는 폐허 속이었다. 거의 다 무너져버린 건물의 벽에 뚫린 창으로 밖을 내다본다. 전쟁의 와중 또다시 공습이 시작된 모양이다. 그런데 나의 그녀는? 그제야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의 여인이 내 손을 잡고 함께 떨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마지막 키스를 하기 위해 다급히 어깨를 끌어안는데 그녀가 뿌리치며 외친다.
“이 난리 통에 한가하게 뽀뽀나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잠이 깼다.

왜 키스가 한가한 행위일까.
더없이 간절한 일이었는데.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어보니 태일이 서 있었다. 한달 만인가. 지저분한 수염이 듬성듬성 잡초처럼 솟아 있다. 자칭 홍대 3대 꽃미남이었던 너도 이제 많이 시들었구나. 피식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녀석은 인사 따윈 귀찮다는 듯 날 밀쳐내며 소파로 직행해 엎드린다. 난 따라가 소파 앞 마룻바닥에 털썩 앉아서 TV를 켰다. TV에선 어제의 프로야구 시합들을 간추려 보여주고 있었다. 결과가 나와 있는 스포츠 경기만큼 맥 빠지는 것도 없다. 게다가 이 하이라이트 자체도 재방송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방송을 챙겨보며 어제의 경기들을 차분히 분석하겠지. 마치 대국을 마친 두명의 기사가 그날의 바둑을 복기하는 것처럼. 그런 타입과는 거리가 먼 우리 둘이 아무 말 없이 TV를 보며 숨만 쌕쌕 쉬고 있다. 우리에겐 우리대로 중요한 시간이다. TV 화면에 무엇이 떠오르든 상관없다. 우리 마음의 페이지들이 차곡차곡 넘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든 생각과 말을 정리할 물리적 시간이 몇분, 아니 몇 십분 정도 필요하다. 마침내 태일이 입을 열었다.

“혜원이가 사라졌다.”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다.
“너 혜원이 좋아하냐? 아님 혜원이가 너 좋아하냐?”
“아니. 아니.”
간단한 두개의 대답. 그러나 태일은 3분 정도 그 대답을 음미했다.
“이적, 라면 좀 끓여줘.”

라면과 김치를 쟁반에 담아내오며 태일이 좋아하는 참치 캔도 하나 따서 곁에 놓았다. 후루룩거리며 국물까지 다 마신다. 냄새가 너무 좋아 한 젓가락만 달라고 하려다 말았다.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서. 태일이가 트림을 부러 거하게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며칠 전에 <우리 선희>라는 영화 봤다. 홍상수 새 영화. 너도 봤지?”
“응. 혼자 가서 봤어. 요즘 영화 혼자 자주 봐.”
“하나 물어보자. 혜원이가 선희 같은 애냐? 도대체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왜 그러냐? 왜 그렇게 질질 흘리고 다녀? 꼬리를 살랑살랑 치면서 남자를 갖고 놀잖아, 안 그런 척 시치미 떼면서. 남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죄다 헤벌쭉거리다 농락당하고. 대체 그런 영화들을 만드는 저의가 뭐야? 먹물들이 찌질하게 진상 떠는 스토리, 예전엔 따분한 예술영화로 보이고 남 이야기 같았는데 이번엔 왜 이렇게 내 마음이 들쑤셔지냐, 막장드라마 볼 때처럼? 결국 남자는 전부 등신이란 얘기냐?”
“혜원씨는 좀 다른 것 같던데.”
“날 위로하는 거야, 혜원이를 감싸주는 거야?”
“전에 우디 앨런 영화 <로마 위드 러브> 보고 같이 얘기했던 거 생각나?”
“그 영화 보고 한잔했던가? 근데 뭐?”
“거기 배우 지망하면서 친구 남친 마음을 흔들어놓는 여자 캐릭터 보고, 너나 나나 옛날 누군가가 생각난다고 했었잖아.”
“어, 그래. 그때 서로 같은 애 생각하는 거 같아서 말을 돌려버렸었지… 그럼 지금 혜원이가 또 그런 애라는 거야?”
“남자들이 간단히 포착할 수 없고 어떤 범주로 규정할 수 없는 여자들에게 쉽게 빠지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홍상수나 우디 앨런이나 그런 수수께끼 같은 여자들이 여전히 궁금한 거 아닐까. 나이가 들어도 해결이 안되니까. 남자의 본능을 영특하게 이용하는데, 그게 천성인 듯 너무 자연스러운 여자들… 그저 헤픈 여자라고 일차원적으로 정리해버리기엔 아쉬움이 남지. 사랑에 빠졌던 스스로가, 그 추억과 세월이 허무해지니까.”
“뭔 소리를 씨부리는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란 영화 봤어?”
“이 새끼가 자기 사무실 직원 11명이랑 다 자고 다닌 여자랑 혜원이를 비교해?”
“영화 보면 그 여자가 이해되지 않아? 심지어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아? 우린 모두 모순 덩어리라서 또 다른 치명적 모순 덩어리에 매혹된다고.”
“시발 새끼, 결국 혜원이한테 뻑이 갔다 그 얘기 아냐?”
“분명히 해두자.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해. 그건 변치 않는 진실이야. <다행이다>라도 다시 한번 불러줄까?”
“제수씨도 나간 거 같구먼, 누가 듣는다고 약을 팔아?”
“태일아. 혜원씨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왜 돌아오지 않는지 나는 모르겠다. 단지 난 지금 네가 어쩌다 그 친구에게 이렇게 푹 빠졌는지 생각해보고 싶을 뿐이야. 예전의 너 같으면 욕을 한 사발 쏟아낸 뒤에 싹 잊고 다른 여자를 찾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 나도 이번엔 왜 이러는지 통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같이 변해가는지.”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조바심 아닐까. 혜원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 몇 마디로 서로의 관계를 애틋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테드 창의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에 나오는 구절을 조금 바꿔 인용해볼게. 네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건 마치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것과 같아. 전진하고 있다는 환상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목적지에 가까워지지는 않거든.”
태일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TV에선 이제 류현진 선수의 지난 경기들 하이라이트가 방송되고 있었다. 우린 멍하니 TV를 쳐다보았다. 정말 누가 보면 참 한가한 행위처럼 보일 것이다. 이 난리 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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